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최초작인 <의심의 소녀>(<청춘> 11호, 1917. 11)에서 주인공 가희의 어머니는 남편의 잇단 외도에 자살로써 항거한다. 가희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외조부와 외롭게 살아가는 불행한 소녀다. 이 작품은 가부장주의에 대한 일종의 고발문학인 셈이다. <칠면조>(<개벽> 18, 19호, 1921. 12∼1922. 1)는 순일이라는 가난한 조선인 여학생이 일본 K부의 여학교에 입학하러 오면서 일어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심리 묘사에 주력한 작품이다. 같은 조선인 사이에서도 빈부의 격차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을 그리고 있는데, <의심의 소녀>에 이어 외적 서사보다는 내면적 심리 묘사에 치중하는 작가의 개성이 드러난다.
<도라다볼 때>는 <조선일보>(1924. 3. 29∼4. 19)에 연재한 후 개작하여 ≪생명의 과실≫(1925)에 싣고 있다. 첩 소생인 류소연은 유부남인 송효순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애정도 없이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따라서 자유연애혼의 이상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념적 사랑에 불과하다. <외로운 사람들>(<조선일보>, 1924. 4. 20∼6. 13)은 순희와 순철 남매의 여러 인물들과 얽히고설킨 연애사건과 결혼 문제를 다룬 중편소설이다.
<꿈 뭇는 날 밤>(<조선문단> 8호, 1925. 5)은 “바람도 잔 오월 밤은 아무 소리 업시 땅 우에서 음울하게 흠칠거리는 것 갓햇다”처럼 서정성 넘치는 시적 문체로 시작하는데, 동경 유학생 출신의 문학을 전공하는 여주인공 남숙의 내적 갈등을 다룬 매우 짧은 소설이다.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에다 친구의 남편인 유부남을 사랑하는 데 따른 내면적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이 사랑은 명시적 사건으로 그려지지 않고 있다. 작품의 결말은 밤 산책을 통하여 자신의 문학적 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맺고 있다. 즉, 개인적 단꿈을 그대로 쓰는 시보다는 “절벽 틈이라도 긔어 올나갈 만할 신앙(信仰)과 그 자신(自身)의 거룩한 순졍(純情)을 옴겨서 그 자신의 위엄을 떠러치지 안을 리상뎍 대상을 확실히 알아놋코 그 사랑을 곱게곱게 펴서 무리 압폐 놋토록 장하고 용감한 졍죠(貞調)로 쓸 것”을 주인공은 깨닫는다. 다른 작품들에서 연애감정의 표출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제시된 것과는 달리 자신의 감정을 고백함으로써 빚어질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여 개인적 욕망을 억누름으로써 겪는 내적 갈등이 잘 포착되어 있고, 그 갈등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려 한 심리적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손님>(<조선문단> 15호, 1926. 4)은 세 자매와 남동생이 집 안 청소를 직접 하는 장면으로부터 발단된다. 이 작품은 사회주의자이자 사업가인 주인성이라는 남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동경 유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을순과 삼순 자매가 주 씨의 직조공장에 여공으로 들어가 그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각오를 보이는 작품이다. 집 안 청소와 같은 노동, 사회주의자, 직조공장, 여공 등의 소재는 김명순의 작품에서는 매우 특이한 것이다.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의 소설 ≪처녀지≫에 러시아 혁명운동기의 견실한 점진주의자로 그려진 인물 ‘솔로민’이라는 이름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작품에서 을순과 삼순 자매의 손님으로 초대받은 주인성은 솔로민과 동격의 인물로 제시된다. 그는 귀족이면서도 민중의 설움을 알고, 시인이면서도 시를 안 쓰고, 천지가 사라져가도 사람의 마음속에 자유를 구하며, 무엇보다도 성질이 너그러워서 공장 사람들을 잘 지도하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의 제시는 이 시기에 김명순이 사회운동에 어느 정도 관심을 보였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KAPF의 조직 등 1920년대 중반 전 세계를 강타한 사회주의 문학운동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김명순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는 매우 피상적 수준에 불과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손님>은 자유연애를 주제로 삼지 않았으며, 김명순의 문학이 매우 현실에 다가섰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나는 사랑한다>(<동아일보>, 1926. 8. 17∼9. 3)의 박영옥과 최종일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다른 상대와 결혼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세월이 흐른 후에 우연히 다시 만나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애정 업는 부부생활은 매음”이라 규정하며 결혼이라는 제도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선택한다. 결말에서 영옥의 남편인 서병호의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나서 최종일의 산정(山亭)을 태우는데도 두 사람은 오로지 ‘사랑한다’는 절규를 할 뿐이다. 연애지상주의라는 주제의식이 가장 뚜렷이 제시된 작품이다.
<모르는 사람갓치>(<문예공론> 1호, 1929. 3)의 순실과 창일은 결혼을 앞두고 순실에 대한 왜곡된 헛소문 때문에 결혼 전날 파혼하고 만다. 다른 여자와 결혼한 창일은 순실에 대한 소문이 거짓임을 알게 되어 관계를 회복하고자 매달리지만 순실은 이를 냉정히 거절한다.
김명순의 소설은 심리 묘사가 탁월하고, 시적 서정에 넘치는 문체가 매우 돋보이며, 자유연애의 이상과 제도적 결혼 사이의 갈등을 반복하여 다루었다. 그는 자유연애의 근대적 이상을 종교처럼 신봉하였고,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집요하게 추구하였다. 남녀 문인을 통틀어서 김명순만큼 철저하게 연애지상주의를 주창한 작가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구여성은 아예 등장하지 않으며, 신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어김없이 연애지상주의 신봉자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자유연애혼의 이상이 제대로 성취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미혼의 여주인공이 연애감정을 느끼는 상대는 유부남이라서 결혼할 수 없고, 이미 결혼한 여주인공은 남편 아닌 다른 남성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며 결혼이라는 제도를 벗어던진다.
김명순 같은 페미니스트들이 정치적, 경제적 여성해방보다는 성의 해방에 집착했던 것은 일제 식민주의의 억압적인 정치상황에서 정치적, 경제적 여성해방을 추구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개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사적 영역에서의 성의 해방을 주 이슈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개인의 섹슈얼리티에 작용하는 남성 지배의 거대한 권력체계를 제대로 통찰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이 이해한 페미니즘은 피상적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아니고서는 근대화를 부르짖고 추진할 세대가 없었던 것이 근대 초기 우리나라의 적나라한 모습이고 현실이었다.
200자평
연애지상주의를 주창한 작가 김명순은 용감하게 여성해방을 부르짖고, 봉건적 가부장주의에 맞섰다. 김명순의 소설은 근대 초의 신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가장 큰 갈등이자 딜레마를 보여 준다. 당시 페미니스트의 문학 활동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뒤늦게나마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그녀의 작품은 페미니즘 문학비평의 중요한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은이
김명순은 1920년대 활동한 한국의 여성 시인이자 소설가다. 평안남도 평양 출생으로 1917년에 <청춘(靑春)>지의 현상문예에 단편 <의심(疑心)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주요 작품은 소설에 <의심의 소녀>, <칠면조(七面鳥)>(1921), <외로운 사람들>(1924), <탄실이와 주영이>(1924), <도라다볼 때>(1925), <꿈 뭇는 날 밤>(1925), <손님>(1926), <나는 사랑한다>(1926), <모르는 사람갓치>(1929) 등이 있으며, 시에는 <동경>, <창궁>, <거룩한 노래> 등이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김명순의 작품은 시 86편(번역시 포함), 소설 22편(번역소설·소년소설 포함), 수필·평론 20편, 희곡 2편 등이다(남은혜의 <김명순 문학 연구> 참조).
그의 소설 작품은 인물에 대한 지적인 분석과 심리 묘사에 치중하였으며, 시 작품은 연정(戀情), 자연의 아름다움, 추억 등을 노래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탄실(彈實)은 필명이자 아명이다. 1925년에 작품집 ≪생명의 과실(果實)≫(한성도서주식회사)과 발행연도 미상의 ≪애인의 선물≫(회동서관)을 출간하는 등 1910년대 등단하여 1930년대까지 작품을 발표한 김명순은 1920년대 중반에 나혜석, 김원주 등과 함께 근대 초기의 여성 문인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이후 도쿄(東京)로 가서 작품은 쓰지 못한 채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다 동경 아오야마 뇌병원(靑山腦病院)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옮긴이
송명희(宋明姬)는 1981년부터 부경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왔다. 1979년 겨울 <세계의 문학>과 1980년 1월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이래 페미니즘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여러 저서를 펴냈다.
≪여성해방과 문학≫(1988), ≪문학과 성의 이데올로기≫(1994), ≪이광수의 민족주의와 페미니즘≫(1997), ≪탈중심의 시학≫(1998), ≪섹슈얼리티·젠더·페미니즘≫(2000), ≪타자의 서사학≫(2004, 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 ≪현대소설의 이론과 분석≫(2006), ≪디지털시대의 수필 쓰기와 읽기≫(2006) 등의 평론집 및 학술서적과 시집에 ≪우리는 서로에게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2002), 에세이집에 ≪여자의 가슴에 부는 바람≫(1991), ≪나는 이런 남자가 좋다≫(2002)가 있다.
여성연구회를 이끌며 소장학자들과 ≪여성의 눈으로 읽는 문화≫(1996), ≪페미니즘과 우리 시대의 성담론≫(1998), ≪페미니스트, 남성을 말한다≫(2000), ≪우리 이혼할까요≫(2003), ≪젠더와 권력, 그리고 몸≫(2007, 2008년 문광부 우수학술도서 선정)을 펴냈고, 공·편저에 ≪페미니즘 정전 읽기 I≫(2002), ≪페미니즘 정전 읽기 II≫ 등을 저술했다.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회장(2006. 7∼2008. 6)으로 활동했으며, ‘한국문학비평상’(1994), ‘봉생문화상’(1998), ‘이주홍문학상’(2002), ‘부경학술상’(2002) 등을 수상했다. 지역문화단체인 ‘해운대포럼’(2004) 회장 및 ‘제7회 달맞이언덕축제’(2006)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차례
의심(疑心)의 소녀(少女)
칠면조(七面鳥)
선례
도라다볼 때
꿈 뭇는 날 밤
손님
나는 사랑한다
모르는 사람갓치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순희야 내가 지금 엇지하면 조흐냐. 나는 시방 안즈나 서나 편안치 못할 뿐이다. 그는 지금에도 나를 퍽 주목은 하시지만 그러타고 내가 그의 마음 전부야 엇지 알겟니. 또 그 때만 하더라도 그이가 돈 만흔 이여서 나를 동정하여 주섯는지 나는 도모지 헤아릴 수 업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이를 못 잇고 잇는 것은 사실이다. 아아 그이를 나는 사랑한다. 또 그이가 나를 사랑하도록 희망한다” 하고 영옥이는 한끗헤 이른 흥분으로써 하소하엿다.
“영옥아 영옥아 너는” 하고 순희는 그 벗을 위하야 울면서 “너는 서 씨에게서 나와야 한다. 애정 업는 부부생활은 매음이 아니냐” 하고 그는 그 벗에게 의리부터 가리키엿다.
-<나는 사랑한다>